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강영식/선수 경력 (문단 편집) === [[삼성 라이온즈]] 시절 === 그래서인지 김응용 감독이 2001년에 삼성의 감독으로 가자 삼성의 주전 외야수였던 [[신동주(야구)|신동주]]를 보내면서까지 그를 삼성으로 데려올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.[*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[[김응용]] 감독이 이 정도로 대놓고 애정을 보여준 선수는 거의 없다. 후에 강영식도 롯데로 트레이드될 때 눈물로 [[김응용]]에게 작별인사를 고했고, 여전히 꼬박꼬박 연락을 드린다고 한다. 여담으로 이때의 생활이 [[http://mlbpark.donga.com/mbs/articleV.php?mbsC=kbotown&mbsIdx=733693&cpage=&mbsW=&select=&opt=&keyword=|방송 캡쳐]]로 떠도는데, 옆에서 같이 밥 먹던 어린 선수는 당시 전도유망했던 부산상고 좌완투수 '''[[채태인]]'''이다.] 2002년 기대에 부응한 강영식은 선발로 이닝은 많이 못 먹었을지언정 9승을 찍으며 가능성을 보였으나 이듬해부터 부진하기 시작해 불펜으로 강등당했고 2004년까지는 그래도 무난한 모습을 보였지만, 선동열이 오자마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. 하지만 자신과 똑같은 좌완에 키도 비슷한데 구속은 더 빠른 150km/h대의 공을 던지며 나이도 더 젊은 [[권혁]]과 경쟁이 붙으면서 위기에 빠졌다. 훗날 강영식이 말하기를 이 당시 김응용의 너무 큰 총애와 경쟁에 대한 압박감으로 늘 마운드에서 도망칠 생각만 했다고. 그 특유의 새가슴은 여기서 유래했다. 이맘때 나온 별명이 '불펜 [[선동열]]'. 결국 [[권혁]]에게 밀려, 2006년 11월 21일 2루수 [[신명철]]을 상대로 '''[[롯데 자이언츠]]에 [[트레이드]]'''되었다. 투수 오타쿠 [[선동열]]이 버릴 정도라는 삼성 팬들의 말이 있을 정도로 불안한 투구를 보였다. 마운드에서 부진한 뒤 선동열한테 라커룸에서 개털렸던 강영식은[* 강영식은 훗날 [[선동열]] 감독이 자신에게 '사람이 해선 안 될 말'까지 서슴없이 하며 인격적으로 모독을 당했었다고 밝혔다. 그때부터 강영식은 적어도 '''[[선동열]]이 있는 삼성'''에겐 미련이 없었다는 걸 볼 수 있다. 즉 [[선동열]]과 강영식 둘 다 서로 딱히 같이 동업할 이유도, 동기도 없었던 것이다.] 이날 털리면서 "아 나는 정말 여기까지인가보다"하는 자괴감이 들어서 남들 보는 앞에서 펑펑 울었다고 한다. 이러한 처지를 보고 코치들이 트레이드를 권유했고, 때마침 좌완 [[중간계투]]가 없는 롯데와 짝이 맞으면서 당시 롯데의 2루수였던 [[신명철]]과 트레이드 되었다. 당시 신명철은 롯데에서 최상위 지명으로 뽑아 [[박정태]]의 후계자로 점찍었으나 공갈스윙만 하고 영 궤도에 못 오르는 2루수였기에, [[트레이드]] 시점부터 팬들도 서로 이해를 했던 특이한 사례다. 결과적으로도 신명철은 노쇠화된 [[박종호(1973)|박종호]]를 대신해 삼성의 주전 2루수로 활약하며 2009년에는 [[20-20 클럽]]에도 가입하는 등 좋은 모습을 보였고, 강영식도 롯데에 꼭 필요했던 좌완 불펜으로 꾸준히 활동했으니 서로 윈윈한 트레이드인 셈. 결국 강영식은 선수생활 두번의 트레이드를 모두 신씨와 했다. 여담으로 [[삼성 라이온즈]]의 창단 첫 KS 우승이자, 드라마틱했던 [[2002년 한국시리즈]] 6차전의 승리 투수가 바로 강영식이다. 삼성의 역사 한 페이지에 기록될 선수 중 하나. 또한 2005년 제1회 코나미컵에서 일본시리즈 우승팀인 [[치바 롯데 마린즈]]를 상대로 구원 등판, 3타자 연속으로 삼진으로 잡아 "국제용 투수 강영식" 이라는 칭호를 들은 바 있다. 하지만 2006년 제2회 대회에서는 좋지 못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